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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쓰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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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1571년 출생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아 유럽 파견 사절단의 임무를 수행한 무사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1613년에는 루이스 소텔로를 정사로, 하세쿠라 자신을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이끌고 스페인과의 무역 협상 및 교황 알현을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1615년에는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을, 로마에서 교황을 만났지만, 일본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통상 협정에는 실패했다. 1620년 귀국 후 기독교 금지령으로 인해 실의 속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여정은 쇄국 정책으로 잊혔으나, 이와쿠라 사절단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현재 멕시코, 쿠바,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지에 동상과 기념 시설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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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쿠라 쓰네나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支倉常長 (하세쿠라 쓰네나가)
다른 이름야마구치 요이치 (山口与市), 지쿠라 나가쓰네(支倉長経), 돈 펠리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 (세례명)
출생1571년
사망1622년 8월 7일
사망 장소미야기현 오사토정
직업외교관
소속센다이 번
묘소센다이시 아오바구 기타야마 고묘지
구로카와군 오사토정 히가시나리타
시바타군 가와사키정 지쿠라 엔푸쿠지
로마에서의 하세쿠라
아르키타 리치가 그린 로마에서의 임무 수행 중인 하세쿠라 (1615년)
하세쿠라 쓰네나가
클로드 데뤼에의 『하세쿠라 쓰네나가 상』 (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일본의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가문
씨족헤이시・사가미 야마구치 씨 → 지쿠라 씨
아버지야마구치 쓰네시게
양아버지지쿠라 도키마사
형제자매쓰네나가
의형제지쿠라 히사나리, 지쿠라 쓰네쓰구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하세쿠라 쓰네요리, 하세쿠라 쓰네미치
생애
출생겐키 2년 (1571년)
사망겐나 8년 7월 1일 (1622년 8월 7일)
개명야마구치 요이치 → 지쿠라 나가쓰네
관위증 정5위
주군다테 마사무네
기타 정보
관련 인물다테 마사무네, 소테로, 교황 바오로 5세, 펠리페 3세

2. 생애

1571년 야마구치 쓰네나리(山口常成)의 아들로 태어나 하세쿠라 도키마사(支倉時正)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키마사에게 친아들이 태어나자 주군 다테 마사무네의 명으로 가문의 봉록 1,200석을 둘로 나누어 600석을 받았다. 임진왜란아시가루(足輕, 경무장 보병), 철포(鐵砲, 조총) 부대장으로 참전하여 조선에 건너갔으며, 오사키(大崎)가사이(葛西)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2]

1609년 전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 일행이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에서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가즈사국 이와다 촌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윌리엄 애덤스가 건조한 갈레온선을 주어 이들을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려보냈다. 이를 계기로 일본과 에스파냐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

1613년 다테 마사무네는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부사로 하는 유럽 파견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은 이시노마키에서 건조된 갈레온선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1613년 10월 28일(음력 9월 15일) 쓰키노우라를 출발하여 아카풀코로 향했다.

1615년 1월 30일(음력 1월 2일)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같은 해 11월 3일(음력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였으나, 통상 교섭에는 실패하고 1620년 9월 20일(음력 8월 24일)에 귀국하였다.[48]

다테 마사무네의 기대를 받았지만, 일본을 떠난 직후부터 일본 내 기독교 관련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귀국 당시 일본에는 이미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실의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1640년 아들 쓰네요리(常頼)는 하인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하고 가문은 단절되었다.[48] 1668년 쓰네요리의 아들 쓰네노부(常信) 대에 이르러서야 사면을 받고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가져온 "게이초 유럽 파견 사절단 관계 자료"는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2001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중에는 쓰네나가의 초상화가 있는데, 일본인을 그린 유화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료 속 그의 이름 하세쿠라를 faxikura로 표기한 것은 당시 ハ행(ha hi fu he ho)을 입술소리(fa fi fu fe fo)로 발음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유럽 방문 중 일기는 1812년까지 현존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공식 문장. 흰색 방패에 불교 만자와 두 개의 화살이 교차되어 있으며, 오렌지색 배경 위에 왕관이 놓여 있다.


당시 묘사된 하세쿠라의 문장

2. 1. 초기 생애

1571년 야마구치 쓰네나리(山口常成)의 아들로 태어나, 하세쿠라 도키마사(支倉時正일본어)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러나 도키마사에게 친아들이 태어나자 주군 다테 마사무네의 명으로 가문의 봉록 1,200석을 둘로 나누어 600석을 받았다. 임진왜란아시가루(足輕, 경무장 보병), 철포(鐵砲, 조총) 부대장으로 참전하여 조선에 건너갔으며, 오사키(大崎)가사이(葛西) 반란 진압에도 참여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센다이 번에서 다테 마사무네를 직접 섬기는 중급 무사였다.[1] 하세쿠라와 다테 마사무네는 거의 같은 나이였으며, 쓰네나가가 그의 대리인으로서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1597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6개월 동안 사무라이로 복무하기도 했다.

1612년, 하세쿠라의 아버지 하세쿠라 쓰네나리(支倉 常成)가 부정부패로 기소되어 1613년 사형당했다. 영지는 몰수되었고, 아들인 쓰네나가 역시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는 쓰네나가에게 유럽 사절단 임무를 맡겨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고, 곧 영지를 돌려주었다.

2. 2. 임진왜란 참전

주어진 소스에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전 답변과 동일합니다.

2. 3. 게이초 견구사절

1613년 10월 28일(음력 9월 15일), 다테 마사무네는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부사로 하는 180여 명 규모의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다. 이들은 이시노마키에서 건조된 갈레온선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쓰키노우라를 출발,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향했다.[10]

이는 1609년 전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 일행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귀국하던 중 태풍으로 가즈사국 이와다 촌 해안에 좌초된 사건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들을 갈레온선으로 송환하면서 시작된 일본과 에스파냐 간 교류의 일환이었다.

1615년 1월 30일(음력 1월 2일), 사절단은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다테 마사무네의 친서와 통상 조약 제안을 전달했다. 같은 해 11월 3일(음력 9월 12일)에는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 및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금박 편지를 전달했다.[10]

2. 3. 1. 파견 배경

1609년 전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 일행이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에서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가즈사국(上総国) 이와다 촌(岩和田村)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지역 주민에게 구조된 일행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윌리엄 애덤스가 건조한 갈레온선을 선물하여 이들을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일본과 에스파냐 사이의 교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8]

다테 마사무네이에야스와의 관계, 그리고 해외 무역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하여 통상 교섭을 추진했다. 사절단은 1613년 10월 28일(음력 9월 15일)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을 타고 쓰키노우라를 출발하여 아카풀코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1614년 막부가 직접 통제하는 영토 내에 기독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유럽 파견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 3. 2. 사절단 구성 및 목적

1609년, 전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 일행이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에서 돌아오던 중 태풍을 만나 가즈사국 이와다 촌(岩和田村)의 해안에서 좌초, 난파되었다. 지역주민에게 구조된 일행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윌리엄 애덤스가 건조한 갈레온선을 선물하여 이들을 누에바 에스파냐로 송환시켜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과 에스파냐 사이에 교류가 시작되었다.[10]

다테 마사무네의 명령을 받아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Luis Sotelo)를 정사, 자신은 부사로 하여 유럽 파견 사절 자격으로 통상교섭을 위해 180여 명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1613년 10월 28일(음력 9월 15일), 이시노마키(石卷)에서 건조된 갈레온선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로 쓰키노우라를 출발하여 누에바 에스파냐의 태평양 연안 도시 아카풀코로 향했다.[10] 아카풀코에서 육로로 대서양 연안의 베라크루스로 이동하여, 베라크루스에서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냐를 거쳐 로마에 도착했다.

1615년 1월 30일(음력 1월 2일)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같은 해 11월 3일(음력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였으나, 통상교섭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1620년 9월 20일(음력 8월 24일)에 귀국하였다.

다테 마사무네는 자신의 영지에 가톨릭 교회를 환영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1611년 소텔로를 초청하고 기독교 전파를 허용했으며, 하세쿠라가 가져온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선교 활동의 거점으로 제 땅을 제공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제를 보내주십시오."라고 적었다.

소텔로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 사절단의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며, 주된 목표는 일본 북부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절단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오사카의 난 참여로 쇼군이 기독교를 탄압(1614년, 직접 통제하는 영토 내에서 기독교 금지)하기 전에 외국과의 무역을 다각화하고 증진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또한, 스페인과의 군사동맹을 통해 마사무네가 도막을 시도하려 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2. 3. 3. 여정

1613년 10월 28일(음력 9월 15일),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은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로, 자신은 부사가 되어 통상 교섭을 위해 180여 명을 이끌고 유럽으로 향했다. 이들은 이시노마키에서 건조된 갈레온선 산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쓰키노우라를 출발하여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 도시 아카풀코로 향했다.[10]

3개월 간의 항해 끝에 1614년 1월 25일 아카풀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스페인인들, 특히 비스카이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16] 이에 3월 4일과 5일에는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명령이 공포되기도 했다.[15]

하세쿠라는 유럽으로 떠나기 전, 일부 동료들을 아카풀코에 남겨두었다.[18] 6월 10일, 사절단은 ''산호세''호를 타고 유럽으로 출발했고, 하세쿠라는 대부분의 일본인 그룹을 아카풀코에 남겨두고 대사관의 귀환을 기다리게 했다.

사절단은 1614년 7월 쿠바 아바나에서 배를 갈아타고 6일 동안 머물렀다. 2001년 4월 26일, 아바나 만 입구에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청동상이 세워졌다.[20]

쿠바 아바나의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센다이 성벽 공원에 있는 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이후, 1614년 10월 5일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 도착하여, 메디나시도니아 공작의 환대를 받았다.[10] 1614년 10월 23일에는 세비야에 입성했다.[10]

1615년 1월 30일(음력 1월 2일),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다테 마사무네의 편지와 조약 제안을 전달했다. 2월 17일에는 라스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녀원에서 세례를 받고 '펠리페 프란시스코 하세쿠라'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0]

악천후로 인해 프랑스 생트로페 항구에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지역 귀족들의 접대를 받았고, 민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10]

1615년 9월 20일 로마에 도착하여 11월 3일(음력 9월 12일)에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하세쿠라는 교황에게 일본과 멕시코 간의 통상 조약 체결과 일본으로의 기독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금박을 입힌 편지 두 통을 전달했다.[10] 로마 상원은 하세쿠라에게 명예로운 로마 귀족과 로마 시민의 칭호를 수여했다.[10]

1616년 4월, 스페인을 두 번째로 방문한 하세쿠라는 다시 국왕을 만났으나, 통상 협정은 체결되지 않았다. 2년 후, 유럽 여행을 마친 사절단은 1616년 6월 세비야를 떠나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로 향했다.

1620년 9월 20일(음력 8월 24일),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일본으로 귀국했다.[10]

2. 3. 4. 귀국

1615년 1월 30일(음력 1월 2일)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고, 같은 해 11월 3일(음력 9월 12일)에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였다. 그러나 통상 교섭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1620년 9월 20일(음력 8월 24일)에 귀국하였다.[48]

다테 마사무네의 기대를 받으며 출발했지만, 일본을 떠난 직후부터 일본 내 기독교 관련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귀국 후 처우에 대해 걱정하는 다테 마사무네의 친필 편지가 남아있을 정도였다. 귀국 당시 일본에는 이미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고,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실의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1640년 아들 쓰네요리(常頼)는 하인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하고 가문은 단절되었다.[48]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귀국할 무렵, 일본은 1614년부터 기독교 박멸 운동이 진행 중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1616년에 사망하여 그보다 더 배타적인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뒤를 이었으며, 일본은 "쇄국" 정책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사절단 방문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스페인 국왕을 비롯한 유럽 통치자들은 통상 및 선교 제안에 호의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게 되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센다이에 도착하자 자신의 여정을 다테 마사무네에게 보고했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olo V)의 초상화, 기도하는 자신의 초상화, 그리고 필리핀에서 구입한 스리랑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단검 세트를 전달했으며, 이들은 현재 센다이 시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마사무네가문의 기록」은 그의 보고를 간결하게 묘사하며,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이야기에 대한 놀라움에 가까운 분노를 표현하는 "(奇怪最多シ일본어)"라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으로 끝맺는다.

:"로쿠에몬(六右衛門,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별칭)은 남방 야만인의 나라에 가서, 국왕 파올로에게 경의를 표하고, 몇 년 동안 머물렀다가, 루손에서 돌아왔다. 그는 남방 야만인 국왕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남방 야만인 국가에 대한 많은 묘사와 로쿠에몬의 선언의 의미는 놀랍고 특별했다."[27]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센다이로 돌아온 직후 이틀 만에 센다이 번(仙台藩)에서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쿠에몬이 센다이로 돌아온 지 이틀 후, 기독교도를 겨냥한 3가지 조항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첫째, 쇼군(将軍)의 명령에 따라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을 버릴 것을 명령받았고, 그렇지 않으면 귀족은 유배되고, 평민, 농민, 하인은 처형될 것이었다. 둘째, 숨어 있는 기독교도를 고발하면 포상이 주어질 것이었다. 셋째,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자는 센다이 번을 떠나거나 신앙을 버려야 했다."

이러한 결과의 원인이 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언행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는 후대의 사건들을 고려할 때, 서구 국가들의 위대함과 기독교의 힘에 대해 열정적이고, 어느 정도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보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교황청과 다테 마사무네의 동맹을 통해 일본을 장악하려는 계획(로마에 있을 당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제안)을 부추겼을 수도 있는데, 이는 1620년대 일본에서는 비현실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스페인 국왕이 박해가 계속되는 한 협정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전달하면서 스페인과의 무역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다테 마사무네는 갑작스럽게 서구 종교와 거리를 두기로 결정했다. 기독교도 처형은 40일 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가 취한 반기독교 조치는 비교적 온건했으며, 일본과 서구 기독교도들은 그가 오직 쇼군을 달래기 위해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다테 마사무네는 쇼군을 두려워하여 그의 영토에서 기독교 박해를 명령하고 여러 순교자들을 만들었다." (1621년 9월 29일, 센다이 출신 저명한 일본 기독교도 17명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돌아온 지 한 달 후, 다테 마사무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편지를 써서 사절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쇼군의 승인과 협력 하에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몇 년 전 무카이 쇼겐(向井昌延)의 조언에 따라 남만(南蠻) 국가에 배를 보낼 때, 에도(江戸)에 몇 년 동안 거주했던 남만인 소텔로(Sotelo)를 파견했다. 그 당시 폐하께서도 남만인들에게 메시지와 함께 병풍과 갑옷 세트와 같은 선물을 주셨다."

인근 필리핀에 식민지와 군대를 보유한 스페인은 당시 일본에게 우려의 대상이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신스페인(멕시코)에서 목격한 스페인의 힘과 식민지 방법에 대한 증언은 1623년 스페인과의 무역 관계 단절과 1624년 외교 관계 단절에 대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결정을 재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스페인 사제들의 일본 밀수 및 스페인 사절단의 실패 등 다른 사건들도 그 결정에 기여했다.

결국, 로마까지 왕복했던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귀국 당시에는 일본에 이미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냉대를 받았고, 2년 후 실의 속에 죽었다. 배교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소테로가 1624년 규슈에서 쓴 편지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경건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여」 선교사의 보호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48]

3. 코리아 델 리오와 하세쿠라 쓰네나가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유럽 파견 사절단은 스페인 남서부 세비야 근처 코리아 델 리오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 작은 포구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52]

또한, 이 마을에는 하폰(Japón/Xapón=일본)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수백 명 거주하고 있다. 이는 하세쿠라 사절단 중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은 일본인 기독교 신자나 현지인 선원, 지원자들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52]

4.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등장하는 작품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무라이》(1980년)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여정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42] 이 소설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1983년에는 김갑수가 번역하여 홍성사에서 《위대한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2021년에는 송태욱이 번역하여 뮤진트리에서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 2005년에는 스페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 《기사쿠(Gisaku)》가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하세쿠라의 여정에서 영감을 얻어, 17세기 스페인을 방문한 일본 사무라이 요헤이의 모험을 다룬다. 요헤이는 마법의 힘으로 현대까지 살아남아 슈퍼히어로가 된다.[43]
  • 존 J. 힐리(John J. Healey)는 2017년에 소설 《세비야의 사무라이(The Samurai of Seville)》를 발표하여 하세쿠라와 그의 사절단의 여정을 그렸다.[44] 2019년에는 속편 《사무라이의 딸(The Samurai's Daughter)》이 출간되었는데, 사무라이 중 한 명과 스페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가는 여정을 다룬다.[45]
  • 스테판 베고앵(Stéphane Bégoin) 감독의 2018년 프랑스 다큐멘터리 영화 《바티칸의 사무라이(Un samouraï au Vatican)》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이끄는 외교 사절단의 여정을 기록했다.[46] 이 다큐멘터리는 2021년 PBS의 다큐멘터리 TV 시리즈 《죽은 자들의 비밀(Secrets of the Dead)》 19시즌 5화로 방영되었다.
  • 아사노 마츠지 작곡의 합창곡 『支倉常長の歌』가 있다.[55]
  • 우에다 신지 작·연출의 『바다의 메아리에 무사의 시가』는 1981년 宝塚歌劇団 별組 공연으로 상연되었다.
  • 1987년 NHK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 제40, 41, 48회에서 사토우 무네유키가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연기했다.
  • 1991년 일 합작 영화 《兜 KABUTO》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여정을 바탕으로 한다.
  • 다카하시 무츠로 대본, 미젠 아키라 작곡의 오페라 『먼 바다의 돛 오페라 지쿠라 츠네나가』(1995년)가 있다.
  •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오듀본의 기도》(2003년)에도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등장한다.
  • 오타 나오키의 저서 『유럽에 사라진 사무라이들』(1999년)이 있다.
  • 카츠카 호쿠세이 원작, 우라자와 나오키 작화의 만화 《마스터 키튼》 10권에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가져온 것으로 여겨지는 태피스트리가 나온다.
  • 류케이이치로의 소설 『버려진 아이 마츠다이라 타다테루』가 있다.
  • 야기자와 쿄우지의 관악곡 「파세쿠라」(2015)는 도호쿠 복지대학 관악부에 의해 위촉되었다.
  • 宝塚歌劇団 소조의 작품 El Japón(엘 하폰)-이스파니아의 사무라이-』(2019년)는 게이쵸 유럽사절단으로 파견된 센다이번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 2022년 뮤지컬 《도검난무》 츠루마루 쿠니나가 오오쿠리가라 소우키슛진 「춘풍도리규전」에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등장하며, 카라하시 미츠루가 연기했다.

5. 유산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의 탐험은 쇄국 정책이 시행된 이후 오랫동안 일본에서 잊혀졌다.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이와쿠라 사절단이탈리아 베네치아 방문 중에 하세쿠라의 탐험 기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35]

1615년 로마 출신 역사가 시피오네 아마티는 저서 "Historia del regno di Voxv del Giapone"에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초상화와 여정에 대해 기록했다.[56]

일본, 멕시코, 쿠바,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동상 및 기념 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국가도시위치비고
스페인코리아 델 리오세비야 부근하세쿠라 쓰네나가 기념 동상,[37] 하폰(Japón/Xapón) 성씨 사용 주민 거주[40]
멕시코아카풀코도시 외곽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36]
쿠바아바나아바나 만 입구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36]
이탈리아치비타베키아교회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일본이시노마키이시노마키 항구, 쓰키노우라[38]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 복제품이 전시된 테마파크,[41] 동상
일본오사토정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2개[39]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무라이[49],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49]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업적이 소재로 다루어졌다. 2015년에는 야기사와 쿄우지가 쓰네나가를 주제로 한 관악곡 '파세쿠라'를 작곡했다.[49]

5. 1. 국보 및 세계기록유산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 관계 자료"는 200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48] 이 자료에는 일본인을 그린 유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쓰네나가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 자료에 쓰네나가의 이름이 'faxikura'로 표기된 것은 당시 ハ행(현대 일본어의 ha, hi, fu, he, ho)이 입술소리(fa, fi, fu, fe, fo)로 발음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쓰네나가가 유럽 방문 중 작성한 일기는 1812년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2013년에는 "게이초 견구사절 관계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기억유산)으로 등재되었다.[48]

5. 2. 동상 및 기념 시설

일본, 멕시코, 쿠바,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동상 및 기념 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국가도시위치비고
스페인코리아 델 리오세비야 부근하세쿠라 쓰네나가 기념 동상,[37] 하폰(Japón/Xapón) 성씨 사용 주민 거주[40]
멕시코아카풀코도시 외곽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36]
쿠바아바나아바나 만 입구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36]
이탈리아치비타베키아교회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일본이시노마키이시노마키 항구, 쓰키노우라[38]테마파크(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 복제품 전시),[41] 동상
일본오사토정하세쿠라 쓰네나가 동상 2개[39]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유럽 파견은 일본에서 쇄국 정책이 시행된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다. 1873년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이와쿠라 사절단이탈리아 베네치아 방문 중에 하세쿠라의 탐험 기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35]

5. 3. 현대적 평가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17세기 초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아 유럽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그의 여정은 당시 일본과 서양 세계 간의 교류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쓰네나가가 이끈 사절단은 통상 교섭을 목표로 했으나, 당시 일본 내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정은 일본과 유럽 간의 문화 교류에 기여한 바가 크다.

쓰네나가가 유럽에서 가져온 "게이초(慶長) 유럽 파견 사절단 관계 자료"는 2001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쓰네나가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인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로 알려져 있다.[49] 자료 속에서 그의 이름 하세쿠라를 'faxikura'라고 표기한 것은 당시 일본어 발음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615년 로마 출신 역사가 시피오네 아마티가 출판한 "Historia del regno di Voxv del Giapone"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초상화와 여정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56]

현대에 이르러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업적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사무라이[49],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49] 등에서 그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2015년에는 야기사와 쿄우지가 쓰네나가를 주제로 한 관악곡 '파세쿠라'를 작곡하기도 했다.[49]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여정은 비록 당초 목적했던 통상 교섭에는 실패했지만, 일본과 유럽 간의 역사적, 문화적 교류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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